10년 전 <첨밀밀>의 각본을 썼던, 5년 전 <남인사십>의 각본을 썼던, 올해 첫 감독작 <친밀>을 완성한 홍콩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안서(岸 西)는 5년전 완성한, 처음에는 자신이 감독 데뷰작으로 점찍어뒀던 <호접비> 각본을 두기봉에게 넘기며 세 가지 조건을 내밀었다. 첫째, 두기봉 본인이 직접 감독할 것. 둘째, 시나리오에서 토씨 하나 바꾸지 말 것. 셋째, 석 달 내로 완성시킬 것(문작 처럼 3년이 걸릴까봐 우려). 이 조건을 받아들인 두기봉을 감독으로 <호접비>는 표준어를 사용하는 두 배우를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 인터뷰 참조)
그렇다면 <호접비>는 어떤 영화인가? 호접비는 안서의 영화이다. 실망스러운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호접비>의 리뷰를 쓰게 만드는 건 나에게는 오로지 안서의 시나리오 때문이다. 이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만은, 허안화가 감독을 했더라면, 관금붕이 감독을 맡았더라면, 그도 아니면 안서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더라면......<호접비>는 상당히 다른 영화로 탄생했을 거다.
대학생인 이빙빙과 주유민은 말다툼을 하다가 사고로 인해 이빙빙만 살아남는다. 3년이 지나 이빙빙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완치됐으니 약을 끊어보자는 의사의 권유에 약을 끊자 갑자기 3년 전 죽은 주유민의 유령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출몰하는 주유민의 유령만도 골치 아픈데 이상한 어린 놈이 달라붙기까지 하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이빙빙은 영화 속에서 자주 달린다. 한 집에 사는 부모님과 조깅을 하고 혼자 달리기도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이빙빙은 그때마다 굉장히 왜소해보인다. 사실 <호접비>는 주유민과의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이빙빙 단독 주연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끌어가야하는 이빙빙의 모습은 그녀가 겪은 사건과 오버랩되며 애처로와보인다. (<호접비>에서 두기봉에 대한 의의를 꼽자면 이빙빙의 모습을 이렇게 찍어낸다는 점이다. 그 점이 탁월했다.)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난 주유민에게 "복수하러 온거냐"며 "그럼 내 목숨을 가져가던가"라는 이빙빙의 대사는, 시종일관 군더더기가 없고 감정의 비약이 없다. <호접비>를 보면서 시나리오 작가가 궁금해지고 찾아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빙빙의 대사 때문이었다. 이빙빙의 대사만큼 다른 조연들의 대사가 생동적이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만 이빙빙의 대사는 여타 홍콩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비약이나 황다무계함이 없다. 굉장히 현실적인거다. 저런 상황에 저런 대사를 날리는게 나도 그럴거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거다. 이빙빙에 비해 주유민은 이빙빙이 존재해야만 나타날 수 있는 캐릭터이고 게다가 유령이다. 처음에 나타나서는 따지기도 하고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또 다시 안서의 희한한 점이 드러나는데, 이 주유민이란 캐릭터를 기묘하게 그려내고 있는 거다. 원인을 굳이 따지자면 이빙빙 때문에 사고를 당한 이 주인공이 다시 나타나서 원하는 게 뭘까? 복수? 아니면 연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화신? 이런 뻔한 의문점을 들게 해주는데 의외로 <호접비>의 주유민은 '유령이 되어 찾아왔지만 이미 3년 전의 죽음으로 시간이 멈춘 사람'이며 '아무리 원하는 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던, 그걸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던, 결국은 사라져야 되는 사람'이고 '잊혀져야 하는 슬픈 사람'이다. 주유민이 등장할 수록 캐릭터 자체가 지닌 이 슬픔은 더 커지고 더 뚜렷해진다. 이게 내가 안서를 기억하고 싶은 두번째 이유이다.
교통 사고 이후로 자가용은 타지도 못하고 약으로 연명하는 이빙빙은 자신의 과거와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모든 제약을 벗어나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사건을 통해 가능할까? 이빙빙은 여러 사건을 거치며 성장하며 빛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의 감정 이입을 도모하지만 영화는 성급하고 간략하게 끝을 맺는다. 뜻깊은 이야기일 수 있던 이야기가 이 수준이 된 건, 난 두기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가 달랐던 게 아닌가 싶다. 본인은 시나리오 대로 찍었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되지....굉장히 짜증난 말이었다.
표준어를 사용하는 배우를 주연으로 해서 대륙 시장을 본격적으로 고려한 작품 아니냐고 위에 링크한 인터뷰에 나오는데, 나는 표준어 사용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이 이야기가 대륙 관객 입맛을 고려한 작품이라 의도적인 상업작품으로 다가왔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놉 상으로 보면 대륙에서 히트 친 원작을 영화로 만든 <심중유귀>나 <문>과 같은 유형으로 느껴진 거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내내, 그쪽 입맛을 고려해 만들었는데 왜 이리 힘이 없나 했다. 딱히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대단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나, 이랬었다. 그런데 보다보니 시나리오 작가가 궁금해지는 거다. 이거 그냥 그런 각본이 아닌 것 같은데. 각본가가 그런 의도로 만든 게 아닌 것 같은데. 궁금해서 찾아봤고 이미 5년 전에 완성된 각본이란 글을 봤다. 그렇다면 <심중유귀> 아류라고 지레짐작했던 내 생각은 한참 틀린 것이다. 이 각본의 핵심은 로맨스가 아니라 성장이다. 거기에 중점을 뒀더라면 굉장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지도. 두기봉의 손을 거치며 로맨스도 아닌, 공포도 아닌, 서스펜스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
덧 : 영화 시작하자마자 베드씬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 만땅이었는데 말이지, 이따위가 베드씬이면 찍질 말던가. 입을거 다 입고 무슨 베드씬이냐. 이불로 교묘하게 가리던가 어두운 조명으로 어떻게 좀 해보지, 이렇게 찍어놓고. 몸에 연인이 각인되고 후반부에서는 몸으로 기억된 연인을 떠올리는 중요한 장면이었는데.....참 짜증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