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老港正傳>의 '항' 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홍콩의 지난 세월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에 가보는 게 꿈인 좌파 아버지 황추생과 그런 남편을 묵묵히 인내하는 아내 모순균, 그리고 심장병을 앓는 그의 아들 정중기는 홍콩의 달동네에서 살고 있고 아버지는 영화관에서 영화 트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지만 현실의 그는 계속 가난한 상태이다. 이에 반해 달동네 이웃들은 하나둘씩 돈을 벌어 그 곳을 벗어나는데 그들은 자식을 유학보내고 대륙으로 가서 큰 돈을 만지거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정중기는 노동학교 출신(황추생은 신념대로 아들을 좌익 학교에 보냈다)이란 이유로 경찰 시험에 3등으로 합격하지만 채용이 되지 않고 어느 회사 면접에서도 출신 학교를 이유로 떨어진다. 아들에게는 변변한 학력도 없고 영어실력도 없고 외국으로 유학갈 돈도 없다. 결국 장사에 뛰어들어 대륙에서 큰 돈을 만져보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아버지는 한술 더 떠 그간 모은 돈을 죽은 친구 아들의 유학비로 가족들에게 의논 한 마디 없이 주고 만다.
<노항전전>은 홍콩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말하며 그 안에서 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어떤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중간중간 들어간 역사적 사건들은 자연스럽고 특히 홍콩 현대사를 모르는 외부인인 나에게 그런 역사적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 영화에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는 건, 주인공인 아버지 황추생 때문이다. 황추생은 홍콩인이면서 대륙을 그리워하고 반환될 날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본주의를 미워하는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설정 자체가 대륙을 자꾸만 홍콩 역사에 끼워넣으려고 하는(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태도를 보이면서 적당한 타협(혹은 포기와 한계)으로 느껴지는거다. 영화는 착하게 흘러가고 갈등을 만들고 화해를 그려내며 현재 홍콩인의 얼굴을 스냅사진 형식으로 담아내지만....비겁한 화해라는 생각이 드니, 쩝.
이런 느낌에는 황추생 캐릭터가 한몫했다고 본다. 상당히 단순하고 평면적인 캐릭터를, 황추생은 아주 '뻔하게' 연기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패주고 싶기까지 했다. 도대체 역할 분석 하고 영화 찍고 있어? 이렇게 묻고 싶더라. 이런 감정을 느낀건, 그 외 다른 조연들-부인역의 모순균, 아들 정중기, 아들의 친구 막문위 이 셋의 연기가 정말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뻔한데도 인상깊었던 장면은 이 셋 덕분이었다. 가령 모순균은 헌신적이고 착한 부인과 어머니 역을 해내는데, 그러다가 남편과 아들이 싸우며 아들이 뛰쳐나가려 하자 아주 재빠르게 양 팔을 뻗어 문을 가로막고 소리친다. "여기는 내가 지금까지 애써 일궈온 내 가정이야, 두 사람 다 자리에 앉아 나가는 건 허락할 수 없어"(대충 이런 대사) 라며 떨어져 앉은 아들과 남편에게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정말 좋더라. 이 둘을 화해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대사가 감동적이었던 게 아니라, 그 짧은 순간에 문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절박감'이 절절했다. 정중기는 이유없이 싫어하던 가수였는데(배우하는 지도 사실 몰랐다), 이 영화에서는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지만 속고 실패만 거듭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는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화를 내 보고 원망스러운 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해보지만 또 다시 힘을 내어 커다란 짐을 들고 걷는다. 정중기는 영화 속에서 짐을 든(혹은 끌거나) 모습으로 많이 등장하고 표정이나 몸짓이나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이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정중기가 막문위를 뒤쫒아갈때였다. 그 엄청난 짐을 메고 막문위를 따라잡기 위해 죽어라 뛰다가 모퉁이를 돌게 된다. 그는 반동으로 엄청나게 휘청거린다. 그의 왜소한 몸과 커다란 짐이 함께 휘청하는데 (이런 상황은 두 번 나온다) 보는 순간 그게 꼭 삶 같고 사람 같더라. 죽어라 뛰는데 폼은 하나도 안나고(보통 멜로 영화라면 폼날텐데) 따라잡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휘청거리기까지 하고, 휘청거리는 모습도 짠한. 그래서 정중기가 몸으로 그려내는 아들의 삶이 그 순간 뚜렷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그리고 막문위. 막문위는 시나리오 상으로 가장 대사가 없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속마음이 어떤지 '대사'로 표현하는 장면은 병원씬을 제외하고는 없다. 막문위의 입을 통해서는 '미국 유학을 간다'거나 '모은 돈이 얼마'라거나 '너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다' 같은 거밖에 없다. 그런데도 막문위가 느끼는 감정의 결을 막문위의 연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면서 그걸 '말'이 아닌 '행동'과 '표정'으로 표현해낸다. 그래서 그런 그녀가 병원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할때 보는 나도 울컥하는거다. 정말 연기 잘하더라. 막문위 팬이라면 꼭 보라고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