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방문하시는 분들은 제가 주신 팬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영화 <밍밍>에 대해 뭐라고 제목을 달까, 주신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팬심을 너무 드러내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됐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주신이 영화계에서 스타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로우예의 <수쥬>와 한 핏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당연히 <수쥬>와 <밍밍>의 주인공 주신 때문이지요. 두 영화에서 주신이 똑같이 1인 2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으로 두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바로 상해 입니다.
이 영화를 주목하게 된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주신 말고도 구설아라는 감독 때문이기도 합니다. 궁금했는데 보고 나니 기억해야할 감독이라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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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검은 생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밍밍(주신)이란 여성은, 아디(오언조)라는 남자에게 빠진다. 아디는 밍밍에게 "넌 정말 그녀와 똑 닮았어."라며 "오백만원과 하얼빈만이 내 전부야"라고 말한다. 밍밍은 다음날 보스를 찾아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오백만원을 달라고 한다. 보스의 부하들에게 쫒기면서 밍밍은 보스의 상자를 가져오고 도주 중 아투(양우녕)에게 돈가방을 맡긴다. 그러다 아두의 집 근처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주신)를 목격하고 그 여자가 아두가 말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밍밍으로 오인받은 여자는 돈가방과 아투와 함께 상해로 가게 되고, 밍밍은 "일이 있어서 상해로 간다"는 아디의 연락을 받는다. 밍밍 역시 상해로 가고 상자를 찾으려는 보스 부하들의 추적이 뒤를 잇는다.
밍밍과 아디
밍밍은 이 영화에서 스카프에 달린 구슬로 적을 공격한다. 그리고 영화에는 "강호"라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비범치 않은 무공실력을 지닌 밍밍과 해결사로 살아가는 아디는 강호에서 살아가는 강호인이다. 이 둘은 시종 검정 옷을 입고 나오고 이 둘의 머리칼 색깔 역시 새까맣다. 무협소설에서 지칭하는 흑의인, 백의인 등의 용어를 떠올려보면 밍밍과 아디의 복장이 현대식 흑의인임을 눈치챌 수 있다.
아디의 대사 중 "강호인은 거짓말을 잘 한다더니"라는 말은 강호의 성격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밍밍과 아디 만이 강호라는 표현을 쓴다. 이 둘과 더불어 상자의 주인인 보스-세 명은 각자 다른 이유로 상자에 집착하는데, 보스는 밍밍에게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밍밍은 이 상자가 판도라의 상자가 아닐까 고민한다. 관객은 이 상자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고, 영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밍밍도 모르며 아디는 끝까지 모른다. 오직 보스만이 알 뿐이다.
나나와 아투
이에 반해 밍밍으로 오인받는 밍밍과 똑같이 생긴 나나는 오렌지색 머리칼에 오렌지색 옷차림으로 시종일관 나온다. 나나를 보필하는 아투의 머리칼 역시 염색 상태다.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밍밍 때문에 이 일에 말려든 아투와 나나는 상자의 존재를 모른다. 이 둘의 눈 앞에는 돈가방 만이 보일 뿐이다. 때문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진장 중요할 것 같은 상자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치 않다, 사실 존재를 모르니 중요할 수도 없고. 아디를 좋아하고 있던 나나는 상해에서 아두를 찾아 나서고 그런 그녀를 아투가 돕는다. 이 둘은 적극적으로 아디를 찾는데 집중하고 덕분에 진실과 더 빨리 마주하며 또 그 덕분에 돈가방을 뺏기고 빈 손으로 서주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아디 찾기를 포기하고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둔 채 아투에게 "나는 밍밍이 아니고 나나이다, 아마 너도 이미 내가 밍밍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겠지."라며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이름을 말하고 떠난 그녀를 남자가 찾아나서며 "너는 처음부터 너였을 뿐"이라 한다. 이 둘은 곧이어 돈가방을 잃어버리고 빈손이 되었지만, 모든 걸 직시했고 진심을 밝혔기에 상자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들만의 고유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 하얼삔으로.
강호인과 상자
밍밍은 아디를 사랑한다고 본인이 믿고 있기에, 보스에게 돈을 달라고 하고 쫒기게 된다. 그녀는 상자가 열고 싶지만 아디와 함께 만나 상자를 열기 위해 잠시 상자를 열기를 뒤로 미룬다. 그러나 상자의 존재를 눈치 챈 아디가 상자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의심에 사로잡혀 상자를 혼자서 연다. 영화 속에서 밍밍은 아디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초반과 후반부의 몇 씬을 제외하고는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밍밍은 꼭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아디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혼자서 일을 처리하다 결국 혼자 다치게 된다. 밍밍이란 이름처럼 뚜렷한 인상과 무공을 지닌 밍밍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대부분 빈 방에 혼자 있거나 기둥 뒤에 숨어서 사람들을 엿보고, 심지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자신으로 자연스럽게 오인받는다. 마치 밍밍이란 인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자의 존재는 영화 속 강호인에게만 중요할 뿐이다. 그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들은 '뭔가가 있겠거니'하며 그 사건에 쓸려 들어가고 만다. 별다른 의심을 품지 못한 채.
밍밍과 나나
밍밍과 나나는 동일한 인물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밍밍은 어두운 면, 나나는 밝은 면. 밍밍이 아무리 아디를 사랑한다고 해도 하얼빈에 가고 싶다는 꿈은 남의 꿈일 뿐이다. 그 꿈에 편승한 밍밍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르는 상자에의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아디를 찾던 나나가 아디를 포기하는 순간, 하얼빈에 가는 것은 자신과 아투의 목표가 된다. 때문에 영화 마지막 눈밭에서 서로 손을 잡을 수 있고, 눈을 맞으며 정화될 수 있는 것도 이 둘이다.
주신의 1인 2역
<수쥬>와 마찬가지로 1인 2역이다. 주신의 인터뷰를 보면 수쥬가 상영되고 있을때 구설아가 찾아와 다음번 자기 영화에 꼭 출연해달라고 했다는데, 당연하다 싶다. 두 영화에서의 주신은 꼭 동전의 양면 같다. 수쥬의 주신이 시간이 지나 밍밍이 되고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어하고...꼭 그런 느낌이다. 주신 답게 연기도 잘하고 있다.
구설아
CF 감독 출신답게 영상이 현란하다. 무술 씬은 파워는 없지만 카메라의 현란함과 멈춤으로 해결하고 있다. <밍밍>에서 구설아는 색깔, 카메라의 흔들림, 음악을 보여준다. 이 리뷰에서 마치 상자의 존재가 굉장한 것처럼 지금까지 적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상자는 영화 속에서 그저 집착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 보다보면 의미와 내용물, 관계들을 짐작할 수 있다. 밍밍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 사랑에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돈과 하얼삔을 빌린다. 아디의 집착 대상은 과거의 어머니이고 어머니 일을 해결못하기에 역시 제자리 걸음을 할 뿐이다.
배우들
설마 장신철? 의아했지만 장신철 맞다. 음하하. 장신철의 목소리를 십분 활용한 것일까? 양우녕은 순박한 청년으로 딱이고. 오언조는 잘생겼더라, 뭐 그래도 모든 여자들이 동경하는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라 별 대사도 없고 그냥 잘생기고 말랐다는 느낌 밖에는. 양공여도 오랫만에 봤더니 반갑더라. 그렇게 화장을 진하게 했는데 의외로 괜찮더만.
상해
<밍밍> 속 상해와, 로우예의 <수쥬>, <자호접>의 상해를 비교해보면 재밌다. 로우예의 상해만 기억하고 있다가 밍밍을 보니 놀랍기도 했다. 밍밍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화의 장소로 하얼빈을 등장시킨다. 눈이 흐드러진 곳을. 이 것만 봐도 이 영화에서 색채가 상징하는 바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