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방축; 익사일 (放.逐; Exiled 2006) 감독 : 두기봉 출연 : 장가휘, 장요양, 하초의, 임설, 오진우, 임현제, 황추생
나한테 두기봉이란 감독은 그렇다. 좋아해, 좋아해, 아직 모르겠어 사랑해까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북경어로 더빙된 걸 볼수는 없어(홍콩 영화다). 기다려. 광동어 판이 올라와. 영어자막 있음 다행이지. 없어. 중국어로 자막 있는거 있어. 그러나 해석 안돼. 허접한 실력이지. 나한텐 그랬다. 여전히 <흑사회> 1, 2는 하드에 갖고 있고 블로그를 접고 싶을 때도 생각한다. 아직은 안돼. 흑사회 리뷰를 쓰면 접어.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창화>를 봤을때의 그 느낌. 나한테 두기봉은 창화 그 자체였고, 다른 영화는 뭘 봤지, 기억 안난다. <흑사회> 1, 2를 만들었고 다운 받았지만 볼 수가 없었다. 볼 여건이 안됐다. 정말 훌륭한 중국어 실력에, 자막을 보면서, 봐야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미룬다. 흑사회 리뷰를 써야 이 블로그를 접을 수 있다. 알고 있다. 두기봉은 나에게 그렇고, 나는 이 블로그에 오는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이길 바란다, 두기봉이. 정말 굉장해요, 전 괜히 좋아하는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존재다. 그리고 그래요 라고 말할 수 있게 나에게 해주는 이 사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알게 해주는 존재다. 나에게 두기봉의 흑사회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같은 그런 존재다. 그래서, 만만해서, <방축>을 먼저 봤다. 우리말 자막이 있어서였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볼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이전에 봤던 영화를 대입시킨다. <이사벨라>는 그저 왕가위 풍 영화의 아류일 뿐이고, <방축>은 오우삼의 홍콩 느와르의 아류일 뿐이다, 라고 쉽게 과시하며 말할 수 있다.
<방축>은 그런 의견을 무참하게 망가뜨린다. 오우삼 풍과 얼마나 다른가 는 두기봉에게 중요치 않고, 두기봉은 영화 자체만으로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한다'는 의의를 준다. 나는 지금 두기봉의 영화를 보고 있다, 를 생생하게 느끼게 만든다. 때문에 <방축>을 보는 내내 영화는 두기봉 그 자체로 다가오고 몰아의 경지에 이르게 해준다.
5명의 친구(다 조폭)가 모여 이틀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친구들 간에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한 친구 '우'를 죽여야 하고 다른 친구는 이를 막아야 한다.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고 은혜를 입었던 친구는 그 친구가 죽는 것을 막을 생각이다. 죽음의 표적이 된 친구는 얼마전 생긴 아이와 집사람에게 살 수 있는 돈을 쥐어주고 싶어한다. 두목은 전화로 당장 죽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고 협박한다. 왜 이들이 이런 관계가 됐는지 영화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이들이 친구(일것같은)란 것도 오래된 사진 한 장으로 설명한다. 캔을 차는 장면이나 어둠 속에서 총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 같은 장면은 <창화>를 연상시킨다. <방축>은 마치 <창화>의 남자 5명이 나이가 들어 다시 틀어진 관계를 풀어나가는 이야기같다.
이 불친절 때문에 느슨한 이야기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그것도 당연하다), <방축>이 홍콩산 느와르 영화라는 점 만으로 그 설명은 생략되고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이건 옳고 그르다, 친절 불친절의 문제도 아니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그냥 당연한 것이다, 홍콩 느와르를 보며 열광했던 세대(이 표현을 이렇게 쉽게 써도 되나 걱정은 되지만) 에게는. 당연한 '사실'이고 '신념'이다. 그리고 두기봉이란 존재 때문에 <방축>을 보는 것은 이 신념이 영상으로 체현되는 의식에 참여하는 선택이 된다. 두기봉은 몰라서 설명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팬에게는 기적같은 축복인 영화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볼만한 액션 장면 몇 개 있는 영화일 뿐이다.
언젠가 '지기(知己)'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의리라고 하면, 흔히 같이 어릴때부터 자란 친구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 사이에 싹트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홍콩의 쇼 브라더스 무협 영화나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의미(어떤 형태로든 은혜를 입거나 준 관계)가 아니라 훨씬 넓은 '지기'의 의미이다. 옛날 중국 고사성어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자신의 음악을 듣고 알아줘도 지기인 것처럼, 자신을 알아주면 지기이다. 은혜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신을 알아줬다는 그 자체만으로, 상대를 위해 목숨을 내걸 수 있는 것.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해야하는 것, 죽더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홍콩 느와르의 정서고 지기의 의미이다. 때문에 이런 정서를 이해할 수 없으면 영화는 자연 유치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별 말도 안했고 눈빛만 마주친 것 같은데 목숨을 거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과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없으니 인정할 수없고 아니면 유치하다고 몰아붙이게 된다. 아니면 어떤 사람은 이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이해하고자 하거나 다른 시각으로 보려 한다. (물론 그런 시각도 그 자체로 의이가 있다.)
황추생, 오진우, 임달화 이런 나이든 사람들이 여전히 주연으로 나오고 그런 나이든 배우들 외에 스타를 찾아볼 수 없는 점은 홍콩 영화계의 커다란 재앙이다. 그러나 역으로, 화면 속의 이런 배우들에게 일말의 위화감도 없이 동조하는 나를 보면서, 어쩌면 이들과 내가 생각하는 홍콩 영화란 일체의 존재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분명 감독의 영역이지만 <방축>을 보며 두기봉이 있기에 영하가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 배우들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영화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방축>의 배우들이 낯익은 존재들이지만, 이들을 딱히 스타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닥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 출연한 것도 아니고 주윤발이나 장국영 같은 종류의 파워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방축>을 보면서 아주 오랫만에 나는 배우들을 보며 황홀경에 빠졌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연기를 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달린 별같은 스타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예전 좋아했던 홍콩 영화는 그런 황홀경을 자주 느끼게 해줬다. 그 이유를 당시 내가 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방축>을 보니 그게 아니었구나 싶다. 가끔 한창 열광할 때 본 홍콩 영화를 떠올리면, 결국 옛날 영화로운 시절만 그리워하는 팬이 된건가 씁쓸하기도 했었다.
<방축>은 나에게 괜찮다고 알려준다. 내가 동시대에 있다는 걸 알게 해준다. 내가 아직 응원하고 사랑한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