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와 관련된 팀블로그를 생각했을 때, 초기 내 목적은 ‘오로지’ 그간 각자가 썼던 홍콩 영화와 관련된 글을 한 자리에 모아 읽는 이가 찾기 쉽게 만들겠다는 점에 있었다. 각자가 번역한 인터뷰나 소식, 리뷰를 한 공간에만 모아도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필자가 늘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예상과는 다르게, 모두들 새로운 리뷰만 올리시는 것이었다! 기존 내 개인 블로그에 썼던 글이나 퍼서 나르려던 얄팍한 의도에 쩔어 있던 내 눈에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인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누가 새 리뷰만 올리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안일한 생각에 잠겨있던 내가 지레 발이 저렸던 것 뿐. 그래서 쓰려고 할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 막히는 증상이 시작되더니 나중에는 책 리뷰조차도 쓰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버렸다. 절치부심하던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울일수록 점점 더 귀차니즘에 빠졌다. 도저히 이대로는 있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2008년에 본 홍콩 영화 몇 편(제작 년도와 상관없이)에 대한 단상을 맘 가는 대로 정리해본다. 말이 단상이지 결국 잡담이다.
12월 30일이 매염방 서거 5주기라 매염방 특집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역시 쓸 말이 없어서. 원래는 <연지구>, <동방삼협>, <종무염> 세 개를 묶어 특집 형식으로 쓰려고 했었는데, 집에 올라가니 피씨방 가서 글 쓰기도 싫고....그러다 날짜를 넘겨버렸다.
곧 <적벽 하편>이 개봉한다. 상편을 즐겁게 봐서 하편에 대한 기대도 크다. <삼국지>를 전혀 모르는 입장이니 각 인물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없었고 그러다보니 배우들에 별 불만은 안 생기더라. 대신 상편을 보면서 ‘오우삼을 때돈으로 매수해 포르노 찍으라고 시키면 정말 볼만한 결과가 나오겠는 걸’ 싶었다. 양조위와 금성무가 거문고(?) 타는 장면이나 임지령과 양조위의 러브씬이나, 이런 장면들에 킥킥 웃음이 나오면서 막 상상이 되는 거였다.
이런 점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선 감독이 두기봉이다. <유도용호방>에서 나름 홍콩의 초미남인 곽부성과 고천락이 유도 대련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세상에...분명 남자 둘이 얽히고 뒹구는데도 아무 느낌이 없다니! 새삼 두기봉 감독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감탄했다. 오랫동안 꽤 두기봉을 좋아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흑사회 이화위귀>의 마지막 장면, 공안과 대치하는 고천락의 모습에는 웃음이 터졌었다. 굉장히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문학상 수상작에 실린 정형화된 단편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해, 영화 자체에도 정이 안 갔다.
오히려 이상하게 정이 가는 작품은 위가휘와 두기봉이 공동 감독한 작품들 - 니딩유, 러브온 다이어트, 백년호합, 종무염 -이다. 짐작컨대 적은 예산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짧은 시간을 들여 찍었으리라 예상되는 이 로맨틱 코미디들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작은 이야기를 웃음을 곁들어 작게 풀어내는데, 각 편당 어떤 찡한 장면 - 사랑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 이 하나씩은 꼭 있다. 아직 이 작품들이 좋다는 것만 알지, 왜 내가 그런 장면들에 그렇게 공감했는지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2008년에 본 최고의 홍콩 로맨틱 코미디는 <신찰사매> 1, 2편이다. 양천화와 오언조가 주연한 이 코미디는 그간 내가 이 두 배우들에게 가졌던 감정 - 왜 저런 애들이 자꾸 영화에 나오는 거야 -을 말끔히 씻어내 준다. 신분을 속이고 용의자(오언조)에게 접근하는 덜렁이 경찰(양천화)의 이야기는 진부하리만치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양천화와 오언조 뿐 아니라 조연들까지 너무나 사랑스럽고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준다. 포복절도하면서 봤다.
기대치가 전혀 없이 봤던 <신찰사매>가 큰 웃음을 줬다만 역으로 기대치가 컸던 유국창의 <아요성명>은 내가 싫어하는 멜로의 단점을 가진 작품이었다. "스타가 되고 싶어"....<아요성명>의 의미도 그렇고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내세우는 것도 그렇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이면을 파보면 그럴 것이다, 걱정 없이 살고 싶고 배역을 선택당하지 않고 선택하는 입장에 서고 싶다는. <아요성명>이란 말 자체는, 역설적으로 배우들(혹은 감독들을 비롯한 영화계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 하고자 하는 말이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말은 간단하자면 스타가 되고 싶다는 말이지만, 좀더 들어가면 선택당하지 않고 선택하고 싶은 입장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아요성명>의 장점은 그런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단 거다. 그렇다면 단점은? 이 영화가 선택한 멜로라는 부분에서 별다른 차별성도 보여주지 못하고 재미도 없다는 거겠지. 이 영화로 오랜 노미네이션 끝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유청운의 연기도 내게는 안일했고 주인공들이 보이는 감정의 고조나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이 너무 허술하다고 느껴졌다. 대신 홍콩의 유명 감독들이 직접 출연하고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옛 홍콩영화의 재현이 반가왔다. 참, 극중 알콜중독 수준으로 술을 먹던 유청운이 영화 후반부 술을 끊어서 배신감이 컸다. 훟.
2008년에 본 최악의 홍콩 영화는 마초성이 감독한 <남재여모>다. 여문락과 고원원을 주인공으로 예쁘게 포장된 이 멜로 영화를 보며 나는 예전 하정우 때문에 <히트>를 봤다가 보는 내내 스스로 세뇌를 했다던 분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하면 지는 거다, 생각하면 지는 거다, 생각하면 지는 거다, 생각하면 지는 거다” 이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봤다. 아 제발 날 쪼잔한 인간으로 만들지 말아줘, 영화적 허용일 수 있잖아, 뭘 그렇게 현실과 대입해서 따져 멜로 영화인데....스스로에게 계속 이런 말을 하던 나는, 영화가 끝날 때 인정했다. 졌다, 난 쪼잔한 인간이었다. <성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세상에, 마초성, 이름을 뼛속에 새겨주마.
영화의 완성도와 전혀 상관없이 왜 만들었는지 궁금했던 영화는 <군계>다. 원작인 만화 <군계>를 워낙 싫어하기도 했고, 킥복싱이라는 소재 자체가 홍콩 영화보다는 왠지 태국 영화 쪽에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뭔가 새로운 액션을 만들고 싶어서 감독이 일부러 이 원작을 가져온건가 싶기도 하고,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니 일본쪽 참여 스텝도 많던데 일본 쪽에서 감독을 찾아낸 건가 싶기도 하고...영화의 뒷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더라. 또 이건 그냥 취향의 차이이지만,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싸우는 여문락과 캐릭터를 보다 보니 ‘쟤들은 눈 나빠질 텐데 왜 일부러 저렇게 어둡게 하고 싸우는 걸까’도 궁금했다.
<야수형경>의 명성은 귀에 익었지만 막상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도저히 감정 이입이 안돼더라. 때문에 임초현이란 감독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증인>을 봤다. 영화 보고 알았다. <트윈 이펙트> 감독이었군. 다시는 궁금해하지 않을랜다. 아래 포스팅한 홍콩 비평가 협회에서 <증인>의 장가휘에게 남우주연상을 줬다. 응원하는 배우이고 그의 노력이 인정받아서 좋고 장가휘가 맡은 캐릭터의 슬픔에 가슴 아프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인상이 흐릿해서 그런지 별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반장으로 나오는 사정봉이 너무 어리고 아이를 잃고 다시 남은 아이마저 유괴당해 또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장정초 역시 모성애를 보여주기엔 역부족이고 너무 어려 보인다. 물론 홍콩인들 눈에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겠다. 사정봉은 장백지와 결혼했고 아이가 있고 하니 홍콩인들 눈에는 충분히 자란 사내로 보일지 모르겠고 장정초 역시 <칠검> 이후로 처음 보니 내 인상은 정확하지 않고. 오히려 사정봉 역을 <미행; 근종; 천공의 눈>의 양가휘 캐릭터로 설정하는 게 더 감저이입이 쉬웠을 듯 하다. 결국 영화는 더 꼼꼼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안겨주는데 이게 상업영화가 가진 한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감독 자체가 생각이 짧았던 게 아닌가 싶다.
팽호상의 경우 <너는 찍고 나는 쏘고>를 놓치고서 <이사벨라>로 만난 감독이다. <이사벨라>의 음악과 영상을 좋아했지만 <공주복수기>를 보니 <이사벨라>보다 <공주복수기>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됐다면 반응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공주복수기>는 마치 짧은 단편소설처럼 시작한다. 애인의 옛 여자친구가 현 여자친구를 찾아온다. 이들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건 단편소설 같다. 그런데 이게 어느틈에 장편 영화가 되면서 이면의 진실이 튀어나오고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공간은 더더욱 확장된다. 이렇게 미묘하게 변하는 부분들이 참 흥미진진하고 그걸 실현해내는 팽호상이 좋아지면서 감독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엄청 높여준다.
2008년은 내가 서극을 재발견(?)한 해이기도 하다. <상하이 블루스>는 정말 좋아했고, <도마단>도 나쁘지 않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영웅본색3> 때문에 난 서극을 오랫동안 무시했고 또 싫어했다. <서극의 칼>로 시작된 애정은 <칠검>으로 강화됐고 <촉산>으로 따뜻해졌고 <금옥만당>으로 포근해졌다. <촉산>을 보고 <촉산전>을 봐서인지 <촉산전>은 내용파악이 전혀 어렵지 않았지만 너무나 재미가 없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너무 많이 날아다녀서 그런 거 같다. 장백지나 정이건이나 너무 날아다닌다.
제일 가슴 찡하게 본 영화는 유진위의 <무한부활>이다. 이 영화는 밀키웨이에서 만들고 두기봉이 프로듀서한 영화인데, 유진위 특유의 코믹이 전혀 없는 영화이다. 또 시간여행이라는 고전적인 설정을 가져왔지만 사실 유진위의 시간 여행 장치는 상당히 어설프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엉성한 영화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찡했다. 홍콩 영화인중에서, 내가 느끼기에, 유진위 만큼 사랑(이성애에 한정되지 않은 모든 걸 포함한 사랑)에 대해 이토록 집요하고 이토록 탐구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결과물이 완정되지 않고 허접할지라도, 나는 유진위의 영화를 보고 나면 지독하게 고민하게 되고 지독하게 가슴이 아려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가슴이 아렸던 장면은 <금계>에서 오군여가 사물함에 머리를 처박고 우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본 어떤 영화에서도 이렇게 절절하게 홍콩 반환이라는 ‘현실’의 의미를 한국에 사는 내가 이토록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다. 단 한 장면으로 <금계>는 그때 홍콩인들의 심정을 동감하게 만들고 나에게 이전에 몰랐던 다른 시야를 열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