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난(台南)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네 명의 고교생 이야기. <경과>의 감독인 청원탕의 2007년 영화다.
빼곡한 논밭 덕에 싱그러운 여름 향기를 화면 내내 자랑하고 있고 특히 자연광으로만 찍은 듯한 영상이 굉장히 편안하다. 보는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카메라 구도가 요란하지 않은데도 편안하고 그러면서도 평범하지 않았다. 인물을 저기다 배치하고 저렇게 배경까지 다 잡을 수 있는 거구나. 싱그러운 배경이 주는 힘을 스크린 밖까지 그대로 느끼게 해주면서, 일상적이지 않은 구도. 그러면서도 그게 또 너무나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거다. 왜 그럴까나.....인물 대신 배경을 많이 담아서 그런 건가. 어쨌든 이런 점은 청춘물(혹은 학원물)에 보이던 당연한 점과 다른 부분인데, 영화 내용은 통속적인데 반해 화면은 일반적인 저 장르물과 다르니 그게 묘하게 신선함을 준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런 싱그러움!
주인공인 ENNO(각본에도 참여했고 극중에서 실제로 노래를 부르고 엔딩크레딧을 보니 본인의 자작곡도 많다)는 심장병 때문에 휴학 중인 학생으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한 데모 테잎을 음반 회사에 보내거나(황당하게도 회사에서는 테잎을 다시 돌려보낸다) 학교 음악제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다 쓰러지기도 한다. 친구인 임함은 글짓기 대회에서도 상을 타는 우등생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고, 고등학교를 5년째 다니고 있는 등강전은 학교 공부는 뒷전인 채 늘 축구공과의 놀이에 바쁘다. 이 셋은 이미 아는 사이인데, 두 소녀는 우연히 장예가이 학교 선생에게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감정 표현하는 걸 보게 된다. (...역시 나는 줄거리 요약에는 젬병)
어쨌든 주인공은 <태양의 노래> 주인공과 비슷한 상황(싱어송 라이터에 병이 있다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슷한 인물 가지고 이렇게 다르게 영화를 만든다는 게 당연한 건데도 약간 새로웠다. 장예가이 맡은, 스승을 사랑하는 고교생 캐릭터도 익숙하고. 주인공인 이 두 명 보다, 컨테이너 벽에 죽어라 축구공만 차는 등강전이나 왠지 심드렁하면서 불안해보이는 임함 캐릭터가 신선했는데 나오는 장면이 적으니 뭐 알 수가 없고. 청원탕은 이렇게 익숙한 고교생 캐릭터 틈에 아버지에게 학대받는 어린아이 한 명을 끼워넣는다. 아이는 배가 고파서 몰래 음식을 훔치고 음식 주인은 뻔히 보면서도 아이가 가져가도록 모른 체 한다.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더 어린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고, 아이는 "엄마 보고싶어"라고 쓴 종이로 종이배를 만들어 개울에 띄워보낸다.
이상이 이 청춘영화(로 보이는 영화)의 새로운 점이다. 계속 호감을 가지고 영화를 따라갔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는? 나는 청원탕이 비겁하다고 느껴진다.
ENNO는 장예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장예가는 쉽게 선생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ENNO와 사랑에 빠진다. 한 명은 그렇다 쳐도, 장예가가 왜 좋아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선생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이 둘의 감정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감정 전이가 빠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감독은 게으르게 느껴졌고 캐릭터들이 학생인지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뭐 이런 건 묘사 상의 소홀함이라 칠 수 있다. 비겁하다고 느낀 건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아빠가 엄마에게 우릴 데려다준대"라는 종이배 편지를 받은 네 명은 미친 듯이 달려가 아이와 동생, 아이의 아버지를 구해내 병원으로 옮긴다. 심장병 소녀는 숨이 차서 쓰러진다. 영화는 소녀가 깨어나서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고, 다음 장면에서 넷은 늘 가던 컨테이너 공터에서 아이와 공을 차며 놀다가 학교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떠나면서 끝난다. 현실일 수도, 꿈일 수도. 장예가는 어차피 퇴학을 당한 상태이고 심장병 소녀가 교복을 입고 있는 것(휴학 중이니까)도 이상하고 해서 꿈인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 심장병 소녀가 바라는 꿈일수도. 꿈이라고 생각을 해도, 종이배를 띄우는 아이를 왜 넣었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그 아이가 처한 현실은 쉽사리 바뀔 수 없는 현실이고 특히 그 아버지는 쉽게 바뀌지 않을거다. 현실은 비정한 거니까, 쉽게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게 바로 현실이지. 그런데 말이지, 그럼 저 아이를 왜 넣은 건데? 웃으면서 축구공을 차는 아이의 모습 한 장면으로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아니면 꿈일지도 몰라 하면서 은근슬쩍 그냥 뒤로 빠지는 거야? 익숙한 청춘물에 '학대받는 아이'라는 '불편한 현실'을 미뤄넣었으면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끝까지 밀어붙어야지. 아니면 빼던가, 뺀다고 해서 청춘물이라는 특색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이게 불편하고 비겁하게 보이는 거다. 다른 청춘물과 다르게 만들기 위해,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래 내가 다 양보해서 위의 두 줄은 내 지레짐작 설레발이라 치고, 감독 자신이 하고 싶었다 치자. 불편한 현실을 밀어넣고는 왜 그 현실을 소재'로만' 그치게 하고 청춘물이란 외피를 두르며 봉합하는 건데?
<몽환부락>이란 영화로 대만 영화계의 차세대 주자로 인정받는 감독이라고 해서, 내가 청원탕 영화를 (몽환부락 이후에 나온) 두 편이나 봤다. 나 이 감독 영화 계속 봐야돼? <몽환부락>은 구할 수가 없어서, 남은 건 <심해;블루차차> 하나인데 봐야할지 진짜 고민되네. 제일 유명한(것 같다) 영화라 안 볼 수도 없고 말이지.
*장예가는 <성하광년;영원한 여름>에서 인상에 남았던 배우다. 연기가 괜찮았다기 보다는 가능성이 눈에 들어왔던 배우. 이 청년은 눈이 슬프다. 그래서 인상에 남고 기대를 품게 되지만, 혹 그런 점이 비극적(?)인 캐릭터 전문으로 될까봐 걱정되기도 하는 배우다. 어쨌든 간에 한동안 계속 찾아보고 싶은 배우다. 이 영화에서도 실망스럽지 않다. 그러고보니 내 프로필 사진도 장예가 사진이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