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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산책/화어(2000년 이후)

[번역] <일대종사> 속 왕가위와 중국인 신분

by 주렁주렁™ 2013. 1. 20.
* 이 글은 홍콩영화평론학회에 실린 列孚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단순 감상을 목적으로 거칠게 번역된 글이며 언제든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원문 링크는 이 곳으로 클릭
** 대륙은 현 공산국가인 중국을 가리킵니다. 보통 저쪽에선 내지(內地)라고 표현합니다.
*** 내가 해석해놓고도 내가 이해안가는 부분 숱함 -_-;;

 "권(拳)에는 남북의 구별이 있어도, 국가에는 남북의 구별이 없다" - [일대종사] 속 왕가위와 중국인 신분 


왕가위가 처음으로 관객들과 숨바꼭질을 하지 않는다. 은유도 없이, 난해함도 없이, 신분의 모호함도 없이, 그는 유럽식 심미와 중국의 전통을 결합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여전히 이것은 낯설은 왕가위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떤이는 이 무협영화가 초콜릿 같다고 한다. 또 어떤이는 "양조위가 한 잔의 커피라면, 장쯔이는 한 알의 설탕"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알에 불과하다면 분명 그 커피 잔은 보통의 잔이 아니라 거대한 잔일 것이다. 그러니 그 컵에는 짙은 커피향을 뿜어내는 커피가 담겼거나 쓴 맛이 섞인 단맛일 것이다. 어떤이는 왕가위가 이번에 가지고 나온 건 보이차가 든 컵이지 절대 홍콩영화가 아니라고 한다. 


사실  왕가위가 엽문을 찍는단 소식을 들었을때 사람들은 [동사서독]이나 어떤 것을 연상했을지 모른다. 왕가위가 불산에서 강호를 찍겠다고? 선공개된 빗속의 결투에서 양조위의 모습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구로자와 아키라의 어떤점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영화 전체를 보고나자 걱정이 사라졌고 도리어 즐겁기까지 했다. 왕가위가 더이상 관객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명쾌해서 더이상 해석이 분분하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부분은, 사람들이 [일대종사]에서 왕가위가 원안을 변경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는 점이다. 왕가위에게 있어 변경은 신선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원문에는 단 한 단어 '종사'만 있었다는데 완성된 영화에는 한 명이 아니라 종사 무리가 등장한다. 어쩌면 왕가위가 창작과 촬영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엽문이란 사람을 돌파했을까? 또 어쩌면 다수 무림인을 만난 뒤에 중국 무술의 숲이 풍성한 시절을 발견하고선 관동지역으로 간 걸지도? 이는 황비홍과 유사하다. 대적하는 적수가 석견 한 명이었을때 감독 또한 피로가 상당했다. 그래서 북방 사부 来踢馆 무리를 등장시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야가 전혀 다르다. 광서 연간에서 1970년대까지를 [일대종사]는 모두 집어넣어 70년을 서술한다. 동시에 왕가위가 엽문을 주축으로 묘사한 부분은 엽문이 홍콩에서 보낸 중`만년의 시기인데, 감독의 농후한 필치는 장쯔이가 연기한 궁이(宫二)가 "기실 내 마음 속에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의 가장 좋았던 시절은 당신과 만났을 때였어요. 이것이 나의 운이었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시간이 없군요."라고 토로하는 장면에 담겨있다. 이런 대사에 왕가위의 의도가 듬뿍 담겨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왕가위 또한 왕가위가 아니며 장쯔이 역시 '한 알의 설탕'이 되지도 못한다. 

 

형의(形意)、팔괘(八卦)、육십사초(六十四招)、태극(太極) 등이 왕가위가 '엽문-영춘을 돌파하는' 영감으로 찾아낸 것들이다. 그래서 엽문과 대결하지 않는 일선천(一線天: 장진)이 등장했을때, 그의 태극(권)은 그저 일장(一長), 일단(一短)의 광경에만 나타난다. 엽문의 영춘과 궁이의 형의팔괘 대결이 우열을 가리지 못하자 궁이란 '한 알의 설탕'은 최고로 강력한 배경이 된다. 기차역에서 궁이와 마삼이 대결하는 장면에서, 뒤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는 [2046]과 왕가위의 이전 영화들과 호응하고 있다. 전편에 담긴 정교한 촬영효과, 아리아풍의 음악,  섬세한 권각(拳脚)과 무수한 클로즈업- 모든 쿵푸 무술이 왕가위의 렌즈 아래서 예술로 변주된다. 초일류의 시각효과는 중문(中文)영화의 최고봉이다. 따라서 영춘, 형의, 팔괘 등이 계속해서 영화에 등장함과 동시에 다른 효과가 나타난다. 지나간 민국시대 무풍(武風)이나 복수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경의감 외에 또 하나, 왕가위가 이번에 중국인 신분을 말한다는 점이다. 


홍콩에 나타난 '저항'의 분위기에서, [일대종사]의 출현은 왕가위를 정점으로 밀어올린다. 이는 문화면에서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탄생한 충돌과 호응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이전 왕가위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중국 역사의 기록-일제 침략, 만주극 등-
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이런 돌변은 영화에 담긴 "권(拳)에는 남북의 구별이 있어도, 국가에는 남북의 구별이 없다"는 사유에 있다. 광서, 선통, 민국, 북벌, 항일, 내전 - 모든 과거를 담아낸다. 이러한 "너무나 중국"적인 표현 형식과 과정이 서술자의 신분을 드러낸다. 자각을 했던 안했던, 이 영화에서 생산된 직접적인 효과는 이런 것이다. 더 괴상한 건, 양조위 외 다른 배우 대다수가 대륙 배우라는 거다. 왕가위는 심지어 대륙시장 요구 때문이라며 조본산`소양양 같은 대륙 북방에서 이름난 소품(장르 이름) 배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런데 이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영화에 있으나마나한 배역들이다.  우리는 일찌기 대륙 합작 영화들에 홍콩의 맛이 덜하다고 비난했다. [일대종사]는 오히려 이런 의혹이 덜하다. 왕가위가 주도한 영상은 그럼 그 중국이 아니란 말인가?

존경은 당연히 일종의 동의이다. 당연히 헐리웃에서도 중국 쿵푸를 존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미묘한 경계에서 이 영화를 감상하자 이런 존경 또한 하나의 이유있는 다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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