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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산책/화어(~90년대)

[번역] 영춘권(咏春拳)과 홍콩 영화

by 주렁주렁™ 2011. 6. 29.
예전에 팀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여기엔 올리지 않았기에 지금 올립니다. 
엽문 1편 개봉하기 전 해석했던 글이니 한참 전 글이라는 걸 감안해서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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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我武威扬 咏春影事"를 번역한 글입니다. 요새 영춘권에 좀 꽂혀서(배우고 싶다!!!) 찾아낸 자료이고 만약 국내에서 <엽문>이 개봉하면 참고가 될 성격이라 판단되어 해석을 시작했습니다..........만, 와 정말 어렵네요. 사람 이름인지 무술 용어인지 시종 구글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해석 자체의 질에 대해서 전혀 자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아래에 소개된 영화들이 우리나라에 소개가 됐는지, 되었다면 국내 출시명과 제목이 같은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해석을 했어요. 읽으시는 분 중에 글자가 틀렸다거나 해석이 잘못됐다거나 아니면 다른 알려주실 정보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단순 감상을 위해 거칠게 번역된 글이며 문제가 발생시 언제든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1974년, 장철 감독은 대만으로 건너가 장궁(长弓) 영화사를 설립하고 순식간에 쿵푸 영화 몇 편을 찍었다. 그 중 하나가 《홍권과 영춘(洪拳与咏春)》이다. 영화에서 '특별히 소개된' 양대 악역 중 한 명이 바로 양가인(梁家仁)이다. 장철의 맘에 든 양가인은 계약을 체결, 계속해서 《소림오조(少林五祖)》、《마르코 폴로(马哥波罗)》、《방세옥과 호혜건(方世玉与胡惠乾)》같은 쿵푸 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다. 특별한 성격의 캐릭터로 굳어진 양가인은 계속해서 악역을 연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사 절대적인 일 없듯이, 4년 후 홍금보에게 발탁된 양가인은《찬선생과 조전화(赞先生与找钱华)》에서 중요한 역 - 일대 종사 - 을 맡게 되고, 나중에는 TVB 드라마인  《천룡팔부(天龙八部)》에서 대협 교봉(乔峰)을 연기했을 뿐 아니라 원가반(袁家班)의 《곽원갑(霍元甲)》의 주연이 된다. 
 


양가인과 영춘권의 인연은 그가 출연한 <홍권과 영춘>이 첫번째고,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연기한 <찬선생과 조전화>에서 연기한 영춘의 종사 양찬(梁赞), 마지막으로 TVB 드라마 《불산 찬선생(佛山赞先生)》에서 연기한 양찬의 사부 양이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당가(唐佳)와 유가량 두 사부가 <홍권과 영춘>의 무술 지도를 했지만 영춘권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1978년까지 홍권(유가량의 <홍희관(洪熙官)>이 대표작)과 상형권법(象形拳法; 성룡의 <사형도수>가 대표작)이 유행했다. 이런 흐름을 돌파하고자 홍금보는 영춘의 달인 위응취(黎应就)를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끝까지 듣고는 박수를 치며 감격했다. "과연 대단한 권(拳)입니다!" 이어 홍금보는 영춘권 자료를 수집해 <찬선생과 조전화>를 완성했다.
 
 <찬선생과 조전화>는 글자 그대로, 청말 두 명의 영춘 명가 - 양찬이 사부이고 조전화가 제자 - 이다. 영춘권의 역사는 홍권 사조인 지선과 동기인 오매사태(五枚师太)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매사태가 이 권을 만들고 제자인 엄영춘(严咏春)이 이를 재정비해 영춘이라 이름지었다 전해진다. 엄영춘은 남편 양박주(梁博俦)에게, 양박주는 황화보(黄华宝)와 양이제에게, 두 사람은 함께 양찬(梁赞)에게 전수한다. 양찬은 장자인 양벽(梁璧)과 제자인 진화순(陈华顺; 즉 조전화)에게, 이 둘은 엽문에게 전수한다. 영춘권은 실전을 중시하고 동작의 간결함을 추구, 쾌공(快攻)이 핵심이다. 때문에 장교대마(长桥大马)의 홍권과 복잡한 초식의 상형권법 과는 다르게 스크린에 적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춘에 담긴 실전(实战)이란 특성을 꿰뚫어 본 홍금보는 현대적인 격투기 원리로 영춘권법을 해석함과 동시에 체계적인 무술 동작을 결합해 다른 풍격을 갖춘 <찬선생과 조전화>를 완성, 당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홍금보의 능력은 <찬선생과 조전화>로 쿵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 말고도, 신인을 발굴했다는 데 있다. 엄청난 악역 배우에서 양찬이란 종사 역을 연기한 양가인의 난이도는 괜찮았고 이해력도 높았다. 이에 반해 조전화를 연기한 왕호의 퇴공(腿功)은 일류였지만 연기력 부족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결국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갔다.

1981년 홍금보는 다시 영춘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양찬 사부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고 제목은 <패가자(败家仔)>였는데 가반(家班)의 형제들을 주연으로 출연시켰다.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원표가 소년 양찬을, 진훈기가,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달인 임정영이 양이제를, 홍금보 자신은 사부 황화보를 연기했다. 이들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패가자>의 가장 뛰어난 점은 주제였다. 당시 범람한 쿵푸물은 이야기가 대동소이해 복수가 그 내용이 아닌 게 없을 정도였다. 이에 유감을 가진 유가량이 <무관(武馆)>을 만들어 무(武)를 겨루다 이기면 바로 끝을 맺고 무로 친구를 맺는 이야기를 펼쳤다. 같은 해 홍금보가 만든 <패가자>는 마치 의도적인 대답같다. 어떤 무학을 절차탁마해도 남에게 적지 않게 해를 끼치고, 진정한 격투에 무슨 여지가 남겠으며, 오직 너 죽고 나 살기만 있을 뿐, 승부가 나면 끝을 맺는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유가량의 <무관>은 홍권 종사인 황비홍의 어린 시절의 수련이 주 이야기이고 홍금보의 <패가자>는 영춘 명사인 양찬의 성장과정을 소재로 삼았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보이는 비무(比武)에 대한 차이가 홍권과 영춘의 구별을 말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지 영춘과 관련된 영화의 수가 홍권에 그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황비홍을 다룬 영화가 100편이 넘는다는 건 잘알려진 사실이다. 홍희관(洪熙官)을 소재로 한 영화 역시 그 수를 셀 수가 없다. 그러나 영춘 고수를 다룬 영화는 홍금보의 <찬선생과 조전화>, <패가자> 두 편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춘은 일반적인 남소림의 권술(拳术)과 다르다. 영춘은 장기간의 리수(黐手) 연습을 거쳐야 하고, 리수의 가장 효과적인 훈련 방법은 개인 교습이었다. 따라서 제자가 적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교습비가 꽤 높았다. 일반계층이 부담할 가격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부잣집 자제만이 배울 수 있었고 당시 '소야권(少爷拳: 도련님 권법)'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춘권법은 광범위하게 퍼질 수 없었다. 50년 대 홍콩으로 건너온 엽문이 제자를 양성하면서야 영춘은 흥성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수련자는 200만명을 넘는다. 엽문 본인은 고등교육(홍콩 성사제반 학원에서 수학함)을 받았고, 젊어서는 불산에서 북파 며인 금산조를 격파했고 일본군 무술 훈련직을 거절했다. 노년에는 홍콩의 수많은 강도를 쓰러뜨린 일로 유명하다. 그러나 행동이 함축적이고 성격이 오만했던 엽문은 생전에 권법 전수에 큰 뜻을 품었지만 말로 표현하는 바는 적었다. 심지어 어떤이는 그를 "오인자제(误人子弟: 남의 자식을 망치다)"라 비꼬거나 "사불교(四不教: 돈이 없으면 배울 수 없기에 가르치지 않는다, 돈이 있어도 더 벌고 싶어서 가르치지 않는다, 총명해도 너무 빨리 배울까 두려워 가르치지 않는다, 멍청해도 제대로 못배울까 가르치지 않는다)"라 비웃기도 했다. 1972년 엽문의 사후에야 문하였던 황순량(黄淳梁), 이소룡, 양정 등 10대 제자의 드높아진 명성으로 엽문에 대한 소문을 씻어낼 수 있었다. 
 

생전에 조용했던 엽문 일대종사는 이소룡과의 인연으로 알려졌다. 영화와 텔레비젼에서 늘 푸대접을 받던 영춘권도 최근에야 새로운 면모를 드러냈다. 먼저 TVB에서 드라마 <불산 찬사부(佛山赞师傅)>에 중년의 원표를 양찬으로 캐스팅했다. 이 후 환후(寰宇)에서 투자한 티비 드라마 <영춘>에서 다시 원표가 노년의 양찬을, 홍금보는 황화보를, 사정봉은 양찬의 제자 양벽(엽문의 사부)을 연기했다.  그리고 최근에 견자단이 주연한 <엽문>이 공개됐다. 

 
견자단은 엽문, 영춘과 인연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5년 전 견자단이 주연한 드라마 <홍희관>에서 그는 엄영춘을 처로 맞는 역할을 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견자단은 다시 사부 원화평을 보조해 액션 지도한 영화 <영춘>에서 영춘의 진정한 고수 양박주(梁博俦)를 연기했다. 그러나 견자단은 이 작품들에 만족하지 못했다. 양자경의 들러리가 되기 싫었던 게 아니라, 원화평이 이전에 설계한 <황비홍>과 <엽문>은 결국엔 영춘의 외형만 뽑아 북파 쿵푸를 다루는 표리부동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유진위와 절친한 친구 원규, 여대위는 함께 영예창고(影艺创库)를 설립, 촬영 계획을 쏟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엽문>이다. 견자단의 출연을 요청하며 심지어 계약금까지 지불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예창고의 창업이 어려워지면서 <엽문>의 촬영도 기약이 없었다. 견자단과 유진위의 인연은 <흑장미 의결금란(黑玫瑰义结金兰)>에 임시출연한 것 뿐이다. 비록 유진위가 <엽문>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친구 왕가위가 그 뜻을 이어받았다. 10년 동안 엽문 역을 계속 준비한 양조위의 <엽문> 시나리오는 당시 유진위와 왕가위의 공동 산물이었다. 상황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만든 <아비정전>과 엇비슷하다. 유진위가 시나리오를 썼지만 결국 왕가위는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 아깝다고 느낀 그는 자신의 이름을 유우명으로 고쳐 <천장지구>를 연출했다. 유진위가 이번에 <엽문>의 다른 판본을 찍을 기회는 없는 걸까?

10년 후 견자단은 <엽문>을 연기할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제작연기의 문제가 그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견자단은 당시 유진위가 자신을 찾아와 엽문을 맡아달라고 하자 수많은 기자들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왕가위와 유진위는 최강의 콤비 아닌가?) 황백명이 영화 제목을 <일대종사: 엽문>으로 개명하자 왕가위가 기획하던 '엽문'과 같은 이름이 됐다. 이 일은 다행히 잘 해결되어 서로의 감정을 다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왕가위와 양조위는 계속 준비중이고, 황백명과 견자단의 작품은 공개됐다. 어찌됐던 홍희관, 방세옥, 황비홍, 곽원갑 이후 엽문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엽문>이 <황비홍>의 100편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이건 중요치 않다. 쿵푸물 팬인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히려 전통적인 쿵푸 영화가 컴퓨터 특수효과를 능가할 수 있냐는 데 있다. 이미 태국의 <옹박>은 홀로 정상적인 궤도에 올랐는데, 당시 앞장선 큰 형이 또 뒤로 처질 수 있을까?  특수효과의 눈부신 영상이 피로 얼룩진 몸이 진짜로 타격하는 충격을 대체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에겐 한 자리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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