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료정>을 다시 봤다. 우리말로 <신 끝없는 사랑>이란 뜻의 이 영화는 예전 홍콩에서 유명했던 <불료정>을 리메이크 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제목만 따왔지 내용은 다른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각본상을 탔지 싶다.
참 정말이지 좋은 영화인데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구나, 싶다.
그때는 몰랐다, <신불료정>이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
영화가 시작하면 유가령이 "망불료 망불료" 이렇게 노래를 시작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서 튕겨 나간 남자가 나온다. 유명한 가수를 애인으로 뒀지만 이제는 한물간 작곡가, 아걸(阿杰: 유청운)이란 남자는 뛰쳐나와 아무도 자신을 못알아보는 뒷골목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한 여자, 아민(阿敏: 원영의)을 공원에서 만난다. 집없이 떠돌아디는 개에게 먹거리를 챙겨주는 아민의 첫모습은 주성치가 주연하고 역시 원영의가 출연한 <007 북경 특급>에서 주성치와 원영의가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영화는 <라스트 콘서트>의 홍콩판이란 세간의 평처럼 남자의 재기와 여자의 불치병으로 후반부가 채워진다. 그렇지만 감독이 이동승 아닌가. 이동승이란 이름답게 <신불료정>은 세상에 다른 이야기가 없다는 걸 인정하며 그걸 다르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걸이 만난 아민의 가족은 거리의 연예인들이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건 홍콩의 야시장에 차려진 천막 안이고 이들이 부르는 노래 역시 옛날 노래다(경국 풍이라고 해야하나?). 이동승은 한 번도 홍콩의 야경을 다루지 않는다. 외부인인 나에게도 익숙한 홍콩의 야경은 이 영화에 없다. 그러나 밤은 수도 없이 나온다. 이동승의 말하는 홍콩의 밤은 야경을 바라보는 멀리 선 누군가의 눈에 잡힌 밤이 아니라, 그 밤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안의 사람들이다. 오히려 이들이 언덕에 올라 홍콩 시내를 조망하는 장면은 환한 낮이다. 그렇게 <신불료정>에는 익숙한 야경이 없다.
영화 제목부터 신파 멜로라는 틀을 부정하지 않는 이동승은, 내가 생각하는 멜로 영화가 가져야 하는 미덕 - 연인이 공명하는 순간 -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약 15년 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원영의와 유청운의 모습은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말로 형용할 수 없도록.
그러나 한 편으로 영화는 주변인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 주류에서 뛰쳐나온(혹은 튕겨나온) 유청운이 자신이 다루는 악기 섹스폰을 연주하는 아민의 삼촌을 보며 뛰쳐나가는 장면을 보라. 아직 삼촌과 친분을 쌓치않은 상태에서도 분노한 유청운은 천막의 공연장에서 뛰쳐나간다. 알고 있는 거다, 삼촌의 모습이 자신의 미래일 수 있다는 걸. 객기였던 탈출이었던 뭐였든 간에 아걸이 현실에서 그걸 눈으로 목도하는 장면을 이동승은 아주 짧게 보여준다. 이 장면과 호흡하며 이루어지는 건 후반부의 연주 장면이다. 아민의 어머니 생일에 삼촌과 그 동료들이 연주하다 늙은 삼촌은 숨이 차서 섹스폰을 아걸에게 던진다. 아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받아서 연주한다. 그 순간 아걸은 외부인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일원이 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민의 놀란 표정은 또 어떤가. 아민도 몰랐던(혹은 몸으로 깨닫지 못했던) 이 남자의 다른 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이 가진 다른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는 장면을 보며 놀라는 원영의 그 짧은 표정. 이동승은 이렇게 짧게 짧게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그 짧은 순간에 관객에게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구사한다. 이런 면은 영화의 엔딩에서도마찬가지다. 원영의의 죽음을 확인하는 유청운의 짧은 모습. 오열도 없고 통곡도 없다. 그저 짧게 남자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손으로 가린다. 이동승은 불치병을 앓는 연인이 가져야하는 통곡의 시간을 최대한 짧게 처리해보이면서 아민이 아걸에게 하는 짧은 말을 문자로 보여주며 영화를 끝맺어 버린다.
오히려 영화에서 클로즈업을 많이 할애하는 사람들은 아민의 삼촌과 어머니이다. 삼촌의 대사는 많고 왕년 가수였던 엄마는 다시 옷을 입고 무대에 선다, 그 무대란 천막 속의 공간이고 바가지를 돌려 관람료를 받는 공간이다. 특히 엄마 역 풍보보의 모습을 이동승은 오래 보여준다. 유청운이 작곡가로 재기하는 부분도, 성공일지 아닌지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유가령이 그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짧게 표현한다.
원영의는 이 영화로 금상장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바로 전 해, <아비와 아기>로 신인상을 탄 배우(아비와 아기에서 원영의는 정말 매력적이다)였다. <신불료정> 다음해에는 금상장에서 <금지옥엽>으로 다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3년 연속 수상이란 엄청난 기록이었다. 당시 나는 이게 상당히 거품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 과찬을 할 수는 없지만 원영의는 수상 결과에 승복하게 만든다. 유청운은 무리없이 연기한다. 어색해하는 모습, 자신과 이들은 다를 거라고 믿는 모습, 화낸 모습, 그리고 소통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유청운은 무리없이 연기해내고 있다. 굉장한 연기라고 과찬할 생각은 없지만, 오히려 매끈하지 않고 어색해하는 듯한 모습이 아걸이란 캐릭터에 더 적절했던 것 같다. 이 둘의 아민과 아걸은 어떤 말도 입닥치게 만들고 무장해제시킨다.
앞서 이동승이 애정을 가지고 조연들에게 할애하는 장면이 많다고 말했다. 진패와 풍보보 그리고 오가려까지 시선이 미치지 않는 인물은 없다. (조연상 후보에 같이 오른 오가려가 상을 못탄 건 오가려에 애정을 품고 있는 입장에서 조금 아쉽지만, 풍보보 연기가 더 눈에 띌 수 밖에 없던 캐릭터라서 할 수 없다.) 특별출연한 장애가 역시 마찬가지다. 장애가 였기 때문에 다시 암이 재발했다는 말에 "완치됐다면서요? 날 속인 거잖아요"라고 분노하며 절망하는 원영의의 모습도 의심없이 다가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제가에 대해서, 만방이 부른 주제가 신불료정은 정말 좋다.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삽입곡에 대한 이름이 나올 때 정말 놀랐다. 만방 뿐 아니다. 진숙화, 신효기, 이종성.....언제 이들의 목소리가 나왔더라, 다시 봐야겠구나 싶게 앤딩 크레딧 자체도 감동이다. 주옥같은 음악의 향연인 영화다, <신불료정>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만방의 주제가는 주제가상을 타지 못했다. 도대체 왜! 하고 봤더니 후보작이 <백발마녀전> 장국영의 <홍안백발>이고 수상작은 <동방삼협>의 매염방 주제가 <여인심>이다. 살짝 이해됐다.
영화는 원영의의 죽음을 확인하는 유청운의 모습을 끝으로 다음과 같이 아민이 아걸에게 하는 말(편지)을 자막으로 보여주며 맺는다.
"만약 삶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죽음 뿐이라면,
일상 속의 끝없는 어려움과 어떻게 마주할 건가요?"
이 영화는 내가 설정한 절대적인 면에 부합되지 않아도 마냥 좋아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 둘이 안고있는 저 포스터의 사진만 봐도 계속 울컥하며 만방의 신불료정을 부르게 만들어주는거다. 사랑이 뭔지에 대해 생각하게-그게 아주 잠깐이라도-만들어주는 거다. 시간을 초월하는 영화란 이런거다. 질문을 던지며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수상 : 13회 홍콩 금상장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