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영화가 있다. 지난 추억과 너무나 밀접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없는. 마치 <동동의 여름방학>을 보며, 어린 시절 방학때마다 놀러갔던 할머니 할아버지(지금은 돌아가신) 집을 떠올리며 영화 내내 '아 저거 나도 했지, 아 저런 기차, 난 통일호였어! 아 저때 난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지' 등의 추억을 환기하느라 바쁜 영화. <영웅본색> 시리즈 3편의 영화 역시 나에게 그렇다. 사실 나는 <영웅본색>이 홍콩 영화 내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홍콩 느와르가 어떤지, 지금 보면 어떨지 등등의 의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있는 건 오히려 이 영화를 보고 뭘 따라 했다는지 그때 내가 몇 살인데 어쨌다는지 등의 추억이고 공감대다.
요즘 영웅본색이 재개봉하며 관련 리뷰를 읽으며 추억의 창고에서 기억을 끄집어내니, 사실인지 아님 윤색된 기억인지 자신은 없다.
어쨌든,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웅본색> 시리즈는 3편인 서극이 감독한 작품이다. 아세아 극장이었던 것 같다, 쉬는 날인가 연휴였던 것 같다. 3편이니까 매진은 아니겠지 싶어 갔고. 집앞에서 95번을 타면 스카라 앞에 내리고, 스카라 앞에서 걸어가다보면 대한 극장이 나오고, 아세아 극장은 더 가서 내렸는지 아님 역시 같은 정거장에 내렸는지 기억 불분명. 내려서 세운상가를 지나쳐 갔었어야 했다. 어쨌든, 중2-고3까지 제일 많이 갔던 극장이 아세아 극장인데 그 이유는 초대권이 생겨서였다. 친한 친구 아버님이 작은 영화사 직원이었고 수입영화 초대권을 종종 주셨는데 큰 영화사는 아니다 보니 극장은 아세아 극장, 영화는 주로 ㅡ.ㅜ <카프리의 깊은 밤>, <추남자>, 돌프 론드그렌 나오는 영화 뭐 이런 거였다. 그렇지만 3편은 돈 내고, 형제 중 한 명과 갔다. 극장에 굉장히 가고 싶었고 이 영화는 매진이 안됐을 것 같았고 게다가 사랑하는 주윤발님까지 나오니 금상첨화였다. 사람은 적었다. 몇 명 안되는 틈에서 봤다. 하.......영화를 보다 그랬다. 서극에 대해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몇 안되는 사람만 있는 극장 안 공기는 딱 그랬다. 미친 놈이 아니라면 영화가 이럴 수는 없다, 였다. 황당하단 웃음을 넘어 극장 안은 분노의 소용돌이가 됐다. 지금 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내용 없는 영화가 어디 한 두개인가. 지금 보면 그냥 웃음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다. 당시 관객은 밀키스 광고 세대였다. 질리도록 그 광고를 본 사람들이다. <영웅본색3>에서 갑자기 주윤발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 '젠장, 이건 밀키스 광고랑 똑같잖아' 였다. 그 장면이, 지금 떠올려보면 방점이 된 것 같다. 그냥 내용없는 익숙한 화 남을 떠나 미친 듯이 분노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그 순간 나는 <상하이 블루스>로 시작된 서극에 대한 애정을 접었다. 아무리 매염방의 주제곡 '석양지가'가 좋아도 수습되지 않았다.
'서극이 베트남 전으로 시대를 역행해 홍콩 반환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영화평도 화가 나고 지긋지긋 했다. 당시 나는 그랬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그게 홍콩이 처한 정치적 현실이고 사회적 실제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럼 영화란 그 시대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 상황을 알면 더 심도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상황을 모를 수 있는 외국의 관객에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걸 몰라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의의를 지닐 수 있어야 하는 게 좋은 영화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긋지긋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보다, 아니 그렇게 대입시키면 안될 영화가 뭐가 있나. 암흑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폭력적인 보스는 중국을 상징하고 아래에서 전전긍긍하는 부하들은 홍콩이 된다, 불화한 가족이 화해하는 내용은 중국과 화해하는 홍콩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남녀주인공들은 반환을 앞둔(혹은 반환 후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등등, 끝이 없다. 나는 홍콩과 중국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 평이 너무 쉽고, 사실 비겁하다고 느꼈다. 그때 내가 결심했던 건 그거였다. 앞으로 만약 내가 어른이 돼 홍콩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쓴다면 홍콩과 중국간의 관계를 끌어들여 그것만 가지고 풀이하지 않고 다르게 쓰겠다.
그러고보면 서극이 날 강하게 만들어준걸지도 모른다. -_-;;
영웅본색 시리즈에서 처음 본 영화는 <영웅본색 2>였다. 당시 친구들이 다 장국영 팬이었다. 친구들은 1편은 정말정말정말정말 재미없고, 2편이 정말 재밌다고 했다. 다들 입에 침이 마르라 공중전화 씬을 칭찬했다. 그래서 난 2편을 먼저 봤다. 내가 홍콩영화에 빠지게 된 계기는 <가을날의 동화>였고 그 영화의 주인공인 주윤발과 종초홍 때문이었다. (글 쓰는 지금 종초홍과 종진도 나오는 영화를 스타티비에서 하고 있다)
어쨌든, 외로웠다, 흑. 다들 장국영 팬이었다. 인사만 나누던 지나가는 선배에게 "혹시 주윤발 사진 갖고 계신 것 있어요?"라고 용기내어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넌 나이도 어리면서 아저씨 타입이었구나, 난 장국영 팬이라서 주윤발 사진 같은 건 없다"였고, 은행으로 진출해 거기 비치된 잡지에서 주윤발 사진을 찢은 후 위문편지에 그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썼을 때도 답장에 쓰여진 건 "학생이 그러는 건 아무래도 본분을 벗어난 일 같고 무엇보다 일종의 범법행위 아니냐"라는 식의 말이었다, 젠장!
어쨌든 나도 울었다, 장국영이 주보의에게 전화하며 죽을 때. 펑펑 울었다. 세상에, 친구들 말대로 어찌나 감동적인지! 막내인 나는 손위 형제 둘이 돌아오자 자랑스럽게 '오늘 영웅본색2를 봤는데 공중전화에서..."라고 말을 꺼낸 순간 "그 영화에서 최고로 유치한 장면이지? 어찌나 웃기던지" 가 대답이었다. 세상에! 순간 나는 굳게 다짐했다, 절대 그 장면 좋다고 말하지 말해야지 -_-;;
<영웅본색 1>은 삼촌 집에서 봤다. 마지막 장면까지 가족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친구들도 "되게 황당하게 죽어버리고 정말 재미없다"고 말했다. 비디오 가게는 너무 멀었고 란마 외에는 딱 하나 있는 비디오가 <영웅본색>이라 그때 봤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주윤발이 "형제란...."하다가 죽는 순간 화가 버럭 났다. 뭐야 감독이 나쁜 새끼잖아, 어차피 죽는 건데 대사는 끝까지 뱉게 하고 죽여야지, 예술도 좋지만 사람 말은 하게 해주고 캐릭터를 죽여야지, 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영웅본색이 서울에서 재개봉 한다는 말에, 지방에 사는 입장에서 부러웠다. 신기하게도 밤 12시 30분에 스타티비에서는 7,80년대 홍콩과 대만 영화를 방영해주는데 서울에서 개봉하기 며칠 전에 영웅본색을 차례로 방영해줬다. 덕분에 1편을 삼촌집에서 본 이후로 처음 다시 봤다. 중국어 자막이든 영어 자막이든 읽을 수가 없어서 화면만 봤다. 음악은 넘치고 스토리는 참 빠르게 진행되고....적룡의 모습이 이제는 그냥 내용 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절실하게 다가오고, 주윤발의 모습도 참 짠하고. 맥주를 홀짝 거리며 보고 있는데 텔레비젼과 등지고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형제가 갑자기 말한다.
"지금 강호가 땅에 떨어졌다는 주윤발이 말하는 장면이지?"
어떻게 화면을 보지도 않으면서, 게다가 외국어를 들으며 아는거지 놀라 물어보니 그런다.
"질리게 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