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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산책/화어(2000년 이후)

실연 33일(失戀 33天; Love is Not Blind, 2011)

by 주렁주렁™ 2012. 3. 19.
실연 33일(失戀 33天; Love is Not Blind, 2011)
감독 : 등화도
원작 : 포경경
각본 : 포경경, 등화도
음악 : 정미
주연: 백백하, 문장



북경의 웨딩플레너인 백백하는 고객의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다 7년 사귄 자신의 애인과 가장 친한 친구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는 연애의 끝으로 시작한다. 애인과 친구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혼자 남은 백백하 주변에는 맘씨 좋은 사장과 회사 동료인 비호감(으로 보이는) 남자 문장이 있다.  작년 중국대륙에서 개봉한 저예산 영화  <실연33일>은 순식간에 흥행수입 1억위엔을 돌파, 신드롬에 가까운 열기를 낳았었다. 재밌는 부분이 몇 개 보여서 그 부분 위주로 적어보겠다.

1.
이 영화에서 중식을 먹는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질 않는다. 이제 동료들과 어울려볼까 하고 백백하와 직장 동료들이 몰려간 술집은 일본식 이자카야다. 거기서 생맥주와 꼬치 안주를 먹는다. 돈많은 고객이 백백하를 데려간 곳은 고급 일식 레스토랑이고, 백백하가 혼자 만드는 음식은 파스타, 룸메이트가 만들어준건 아이스크림이다. 백백하가 옛애인을 회상할 때 대사도 "그와 함께 여기서 하겐다즈를 먹었지."이다.

2.
영화의 배경인 북경이 굉장히 화려하다. 여행가고 싶어지더라. 자금성이나 왕푸징이나 곳곳이 다 세련됐고 가보고 싶어진다.

3.
남자주인공인 배우 '문장'. 지금 대륙에서 80년대 생 남자배우중 가장 잘나가는 배우란다. 이 배우가 티비 드라마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했는지 모르겠어서, <실연33일>의 캐릭터가 얼마만큼 평소 그의 연기에서 덕을 보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그걸 모르니까 이 영화 자체 캐릭터만 이야기할수밖에.
이상해, 이 남자 완전 지금식으로 말하면 초식남이다. 왜소해보이고, 계속 타블렛 피씨나 만지작거리고, 쉴새없이 챕스틱을 꺼내 입술을 바르고, 옷차림은 거의 7부 9부 바지에 말투는 초반에 여장남자 말투다. 전혀 호감을 가질 수가 없는 캐릭터이다. 왜 이렇게 설정을 했을까? 물론 그 캐릭터가 뒤로 가면서, 왠지 멋져보이는 마력을 발휘하긴 하는데...설정 자체를 이렇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게' 한 건, 대륙에서 원하는 남성상이 저런건지 궁금해지더라. 이성인데, 동성과 비슷한 이성. 독설을 내뱉지만 틀린 말은 없고 이면엔 나에 대한 배려가 녹아있는 남자. 근데 왜 계속 챕스틱을 바르냐고. 웃기려고 넣은 설정인가?

4.
<실연33일>은 실연을 통한 성장을 그리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 성장이 애인의 빈 자리를 새로운 애인이 채워주는 것으로 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결국 삐그덕거린다. 나 자신의 힘으로 실연의 고통을 딛고 일어나 한단계 도약하는데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애인까지 생기는 걸로 끝맺기 때문이다. 양자간의 균형이 안맞다보니 결말은 뜬금없고 무리로 다가온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상업영화니까 오히려 영리하게 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5.
무리없이 진행되는 게 좋았다. 배반을 안 백백하가 친구를 불러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화를 내는 장면도,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화를 내서가 아니라 요란하지 않게, 오버하지 않고, 그렇다고 엄청 후련하지도 않지만, 백백하가 친구 앞에서 컵을 바닥에 던져버리는 장면이 좋았다. 만약 머리채를 잡거나 폭력을 휘둘렀다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실망스러웠을거다. 난 그렇게 못하니까. 그래서 주인공의 행동이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내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면서, 더 호감이 생겼다. 재회한 옛애인 앞에서 엎어진다거나 오물을 뒤집어쓴다거나 옷이 찢어진다거나 식의 망신도 당하지 않는다.

배신을 당했지만 어쨌든 잘못한 건 니들이다. 나는 혼자 남았지만 뒤에서 사람 뒷통수를 친 건 내가 아니라 내 애인과 내 친구다. 그걸 몰랐다는 것과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게 고통스럽지만, 어쨌든 내게 도덕적인 죄책감은 없다. 나는 최소한 니들보다 떳떳할 수 있다. 나는 괜찮은 인간이다. 백백하의 이 감정이 깨어지는 장면 하나만으로 나는 <실연33일>이  좋았다. 우연히 다시 만난 옛애인의 "너는 늘 그렇게 니가 우월한 위치에 있으려고 하지. 늘 남을 내려다봐. 상대를 하찮은 인간으로 만들어. 나는 그 여자를 만나서 너랑 깨진게 아니라 니가 싫어서 그 여자가 좋아진거야." 란 말을 듣고 백백하는 멍하다. 왜? 잘못한 건 니들인데? 그리고는 옛애인이 탄 택시 뒤를 쫒아 달린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다시 돌아와달라고. 이제야 백백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달리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았으니까 고치겠다고 말하면 돌아와줄 것 같다. 달리는 백백하와 그녀의 독백이 흐르는 이 장면이 불어넣어주는 감정의 고양감이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어느새 나도 백백하와 함께 뛰고 있는 것이다.

<실연33일>에서 가장 리듬감 있고 감정이 폭주하던 이 장면의 다음 장면은 바로 (도대체 어디서 뛰어나온겨) 문장이 백백하의 손을 잡고 못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다 저 택시 놓친다며 놔달라고 소리지르는 백백하에게 문장은 바로 따귀를 날린다. 어떤 관객은 황당할 거고 어떤 관객은 뭐 저런 미친놈이? 할지도 모른다. 백백하는 바로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한다. 문장은 "(술) 깼어요?"라 묻는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직도 저 사람을 사랑하고 이제서야 내 잘못을 깨닫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미 깨어진 관계이다. 그에게는 내 말을 들어줄 의무도, 관심도 없다. 그게 실연인 것이다. 달리기에서 따귀로 이어지는 짧은 장면으로  <실연33일>은 '(관계가)깨졌다는게 뭔지' 혹은 '(꿈에서) 깨어야 하는걸'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가 좋았다.
끔찍한 엔딩이나 그 외 부분들은 딱히 거론않는다.
내가 꽂히는 영화는 전체적인 완성도 보다는 어떤 한 장면, 한 대사의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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