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작부터 부부싸움을 목격하는 소녀를 보여준다. 소녀는 의족을 하고 있는데 뒤이어 시골 할머니집에서 살게 된다.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것 같이 보이는 조그만 시골마을 소녀의 이웃집들 상황은 이렇다. 저쪽집, 할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의리의리한 별장에는 돈 많은 유부남의 정부 종초홍이 산다. 소녀의 맞은편 집에서 부부는 밤마다 sm 행각을 벌인다. 저쪽집 잡화상에는 늙은 남편을 둔 금연령이 젊은 우편배달부 탕진업을 계속 유혹하다 몸을 섞는데 성공한다. 절룩거리는 소녀는 우연히 sm 부부를 쌍안경으로 목격하고, 신뢰하는 우편배달부가 금연령을 때리는 걸 보게 되고, 또 우연히 한 밤중의 살인현장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시체도 없고 증거도 없으며 무엇보다 범인과 피해자의 얼굴도 못봤다. 누구도 소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소녀 또래의 마을 아이들만이 신나서 비밀을 공유한 뒤 단서를 찾아 수색작업을 벌일 뿐이다.
대충 '훔쳐보기'라 해석할 수 있는 84년 영화 <규정>은 쇼브라더스와 신인감독의 만남이 당시 어떤 형태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영화이면서 각본인 이벽화가 중요한 영화이다. 우선 시작하면 쇼 브라더스 로고가 나온다. 임혁화의 종초홍 글을 떠올려보면 <규정>의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83년 종초홍과 이미 <남과 여>로 작업했던 만재량이 특별출연한다)
"뉴웨이브 영화는 패기와 이상이 강했다는 점에서 스튜디오에서 생산하는 영화와 달랐다. 또 감독과 배우의 나이가 비슷해서 상호 신뢰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내기가 쉬웠다. <남과 여>가 쇼브라더스 작품이었지만 그 홍콩영화가 이렇게 젊은 시대였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최고로 보수적인 큰 회사도 모종의 '실험'을 원하고 있었다. 비록 누구도 감히 감독이 피와 뼈가 있는 사실적 풍격을 추구한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사장의 눈에는 미스홍콩 출신을 이용해 에로물로 잠깐 돈을 벌 수 있다 싶었다."
거대 제작사가 미스 홍콩 출신과 신인감독을 기용해 만든 에로영화, 그게 <규정>의 첫번째 성격이다.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이 침대에서 저 침대에서 계속 베드씬이 벌어진다. 물론 그 중심에 있는 건 당시 섹시스타였던 종초홍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2/3 정도 지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영화는 이제까지의 지루한 베드씬을 집어던지고 막 내달리기 시작한다. 누가 살인범인가?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소녀의 짐작이 계속 비껴가고 증거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선량해보이는 어른들의 추한 본모습도 점점 더 드러난다.
마치 뒷부분을 위해 이벽화는 앞서 촘촘히 복선을 깔았던 것 같고, 감독은 앞부분을 제작사의 요구에 맞춰 그리 야하게(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안 야하지만) 찍었나 싶어진다. 꼭 "에로물을 만들겠습니다"라며 제작사서 돈을 받아낸 뒤 기다려라, 앞부분은 니들 뜻대로 찍어주고 뒷 얘기는 우리 뜻대로 만들겠다 작정한 영화같다. 그런 점이 재밌었다. 그런 활기가 느껴져서 재밌었다. 분명 전체적으로 보면 그저그런 영화인데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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