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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산책/화어(~90년대)

유금세월(流金歲月; Last Romance, 1988)

by 주렁주렁™ 2011. 10. 6.
유금세월(流金歲月; Last Romance, 1988)
감독 : 양범
원작 : 역서
각본 : 역서, 양범
주연 : 종초홍, 장만옥, 추루미 신고, 유조명, 여소전



(예전에 <미소년지련>을 보다가 꺼버린 기억이 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감독 스타일이었고, 얼마나 싫었는지 이 감독 영화 다시는 안보리라 이름까지 외웠었다. 이번 부산영화제 양범 특별전 소식에 놀랍기도 했고. 어차피 한 편 보다 만 경우이니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여신님이나 볼 겸 개봉당시에도 궁금했던 <유금세월>을 봤다. 내 취향에 양범은 너무나 안맞는 느낌. 미리 밝혀두지만 이 리뷰에는 좋은 이야기 없다.)

숙모집에서 얹혀살던 가난한 종초홍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친구인 장만옥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아직 고등학생인 이 둘은 우연히 일본인 유학생과 만나 해양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루 즐긴다. 졸업과 함께 장만옥은 꿈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대학으로 진학하고 종초홍은 생업으로 뛰어들어 우정을 이어나가지만 장만옥은 종초홍이 돈을 위해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엔 1988년이란 시대 분위기인가 싶었다. 대학 졸업반 정도의 나이에 늙었다며 저리 초초해하는 모습들이. 영화 끝까지 이 둘은 나이, 즉 시간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세히 보니 시대상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감독인 양범과 상관이 있다. 양범에게 소녀란 청춘과 순백색의 상징이며, 소녀가 아닌 존재는 늙은 존재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늙은 게 아니라 소녀가 아니면 다 늙은 것이다. 소녀들은 하얀색 교복을 입고 깔깔거리며 이 둘의 방에는 봉제인형이 놓여있고 여가시간에도 하얀색 옷을 입으며 잘때도 흰 잠옷을 입는다. 해양공원에 함께 간 일본인 남자 역시 하얀색 셔츠를 입고 시를 쓰는 낭만적인 인물이다.

양범이 그려내는 소녀병 환자들인 종초홍과 장만옥은 소녀시절에 성장이 멈춰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더이상 소녀가 아니며 현실이란 파도를 헤쳐나가야 하는 성인들이나 소녀병 환자들답게 목표는 소녀의 복원일 뿐이다. 그래서 그 복원을 위해 해양공원에서 추억을 나눴던 일본인을 다시 현실로 끌어들인다. 이 일본인 역시 환자인지라 하루 데이트했을 뿐인데 이후에도 그 여학교에 찾아가 종초홍과 장만옥을 찾고 졸업생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조르는 남자이다. 

다시 만난 일본인에게 두 여자는 각기 마음을 두고 있다. 장만옥이 디자이너인 자신의 특성을 살려 드레스를 입고 남자를 만났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다. 남자의 관심은 오로지 소녀, 순백색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남자와 다시 만났을때 종초홍이 입고 있는건 하얀색 웨딩드레스이며 이후 남자와 데이트 할 때 입는 옷도 흰색 계열의 옷이다. 남자가 종초홍에게 완전 마음이 기우는 게 당연하다. 일본에서 종초홍과 남자가 해후, 밤을 보낼때의 종초홍 옷 색깔이 흰색이 아니란 것 만으로도 재회한 이 둘의 관계가 파국이라는 것도 짐작가능하다. 

어쩌면 셋에게 해양공원의 추억이 그리 강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은 그 한번의 만남을 가지고, "계속 생각했다"고 하고 "너희 둘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며 "10년간 계속 좋아했는데!"라며 울고 "10년이란 시간 동안 너를 그리워한 나에게 어떻게 이럴수가"라며 분개한다. 대사를 듣다보면 셋이 계속 말하는 건 시간이고, 해양공원의 기억이다. 이 셋은 각자 자신들의 소녀를 복원하기 위해 해양공원을 공유하고 있는 한 명을 잡아야한다. 더이상 늙지 않기 위해 과거를 복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두 여자 중 하나를 사랑해야하며, 두 여자는 한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란 없다. 

삼각관계인 멜로 드라마 부분이 이렇다면 두 여자의 우정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영화속에서 그리는 이야기는 이 둘이 약 고3때부터 29살까지 10년간 겪은 일이다. 10년간 대단히 큰 일을 겪었을 것 같다만,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경험을 할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직업의 변화, 연애문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관객인 내 입장에서는 별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는 계속 "이 얼마나 시련을 돌파한 아름다운 우정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녀들인가!" 태도다. 도대체 무슨 시련? 그래, 경험이 특수하지 않다고 감정이 특수하지 않다는 건 아닐테니까.

그럼 감정은 어떤가? 이 둘은 서로의 삶을 잘 모른다. 종초홍은 장만옥의 회사생활을 잘 모르고, 장만옥 역시 종초홍이 만나는 남자도 결혼할 남자도 잘 모른다. 그저 통보로 알 뿐이다. 함께 보낸 건 10년이란 시간일 뿐이다. 같이 밥 먹고 남자친구 없냐고 묻고 새로 산 집이나 보여주는 시간. 물론 그 시간이 무시못할 이유라는 건 알지만.

<유금세월>에서 찬양하는 소녀들의 우정이란 구체적으로 이렇다. 
1.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종초홍이 계단에 앉아 울며 신세한탄
---> 장만옥 안으며 위로, 살집 대신 해결해주기. 
2.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한 장만옥이 침대에서 울며 사과
---> 종초홍이 안으며 위로, 장례식부터 대신 해결해주기

3. 일본인과 헤어진 종초홍이 소파에 앉아 울며 한탄
---> 장만옥이 안으며 위로, 일본인 찾아가 오해라며 설명, 대신 나대주기.

 
양범이 보는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같이 앉아 징징 짜주면 된다. 한 명이 손수건을 꺼내들고 울음을 터뜨리며 신세한탄을 하면, 다른 한 명이 위로해주고 안아주면 된다. 그래도 상상력이 있는 작가라면 같은 위로 장면이라도 "밥심으로 살지"하며 같이 밥먹으며 울기라거나 티비나 영화를 보며 울음을 터뜨린다거나 식으로 다양성을 주기라도 할텐데. 양범에게 그런거 없다. 관심사가 이게 아닐테니까. 얄팍하고 얄팍하고 또 얄팍하다. 아주 밥맛없는 감독인데, 똑같이 색깔부터 세트까지 치밀한 건 담가명같은 감독들과 마찬가지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나 생각해봤다. 영상 역시 얄팍하고 얄팍하고 또 얄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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